알쓸신잡3 장기려 박사
본문 바로가기

연예 ·TV

알쓸신잡3 장기려 박사

반응형

알쓸신잡3' 장기려 박사 

부산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외과 의사 장기려 박사.

부산시 서구 아미동 송도해수욕장 근처에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건물이 있다. 이곳 복음병원 본관 7층에 옥탑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 사셨던 생가이다. 부산 의료인들에게는 정신적인 뿌리처럼 훌륭한 분이셨고, 삶 또한 소박하게 사셨다. 

계단을 따라 현관 앞에는 "장기려" 라는 문패가 새겨져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20평 정도 되는 옥탑방안에 소박하고 한평행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다 가신 장기려 박사님의 삶 그자체를 볼수 있다. 

책상하나와 침대가 전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독립정신을 가르친 의성학교를 설립한 부친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조모의 영향을 받아 의사의 꿈을 품고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대)를 지원하였지만, 당시 조선인을 1/3 밖에 뽑지 않아 합격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하지만 이윽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최고의 외과의사셨던 백인제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1932년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다.

이후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진료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아내와 5남매와 헤어져 아들 한명만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오게된다. 그후로 가족과 이별을 하게된다.

피난후 장기려 박사는 부산 육군병원에서 전쟁환자들을 진료하였으나, 당시 의사와 병원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달리 할때 미국 유학 중 귀국한 전영창(거제고등학교 설립자)과 한상동 목사와 함께 구호병원 설립의 뜻을 모아 부산 영동 창고를 빌려 무료진료소(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를 세웠다. 

당시 천막으로 진료소를 지은후 사과상자를 모아 수술대를 만들고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서 수술을 하였다. 선교회에서 받은 500불이 병원 운영비의 전부였던 진료소의 40명 직원들을 위해, 딸린 식구 수 만큼 월급을 주었다고 한다. 식구가 달랑 2인 장기려 박사는 가장 적은 월급을 타간것이다. 

장기려 박사는  환자의 진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지불하기 일수 었다. 

장기려 박사님의 이름은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간연구에 미친 공로가 공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간연구 개척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미 1943년 평양에서 간암환자의 간 일부를 뗴어내는데 성공 하였고, 1959년 국내 최초 간 절제수술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간 외과 발전에 큰 획을 그은것이다. 

또한 간 연구로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한 바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