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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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치

전원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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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 이름 뒤에는 변호사라는 직함이 따라붙지만 현재 그의 본업은 방송인에 가깝다. 변호사 일은 개점휴업 상태, 사무실은 주로 방송을 준비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사무실 한쪽에는 여러 방송사에서 받은 기념패, 감사패 10여개가 진열돼 있었다. 그 가운데 특이하게 한국담배소비자보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받은 공로패가 놓여 있다. 그는 애연가다. 2008년 MBC ‘100분 토론’ 400회 기념으로 받은 ‘최고의 논객’ 상패도 있다. 그는 요즘 가장 ‘핫’한 논객, 이 시대 ‘최고의 입’으로 꼽힌다. 탄탄한 논리와 거침없는 언변으로 토론계의 ‘전거성(巨星)’으로 불리며 예능인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 1990년 전원책 변호사가 군법무관 시절 집무실에서 시를 쓰고 있다.

▲ 1989년 군법무관 시절의 전원책 변호사.


1990년 전원책 변호사가 군법무관 시절 집무실에서 시를 쓰고 있다

  변호사, 방송인 외에 그가 자신의 본업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있다. 그는 등단한 시인이다. 그것도 문단에서 ‘천재의 등장’이라고 할 만큼 촉망받던 시인이다. 한때 문학 계간지들이 그의 특집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2016년 10월 세 번째 시집 ‘나에게 정부는 없다’(포엠포엠)를 펴냈다. 시인 이근배는 그를 이렇게 평한다. ‘전원책은 시인이다. 그의 시는 언제나 시대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날 선 칼끝이었고 남의 눈치를 보거나 문단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독보적이면서도 번득이는 감성의 언어를 채집한다. 그의 시는 외도가 아니고 정도이다.’

   
   그는 1955년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여천리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말보다 글을 먼저 깨우쳤다.’ 그에 대해 이렇게 써놓은 글을 읽은 기억이 나서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실은 제가 온 동네에 벙어리로 소문이 나 있었어요.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도 말을 못했습니다.” 말은 안 터져도 영특했던 모양이다. 여섯 살에 조기입학한 그는 1학년 때부터 문재(文才)를 드러냈다. 학년 대표로 울산 학생백일장을 나가 ‘돌’이라는 시로 입상을 했다. ‘돌에도 생명이 있을까’로 시작한 작품을 보고 심사위원이 극찬을 했다. 상품으로 국어사전을 받았다.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칭찬을 받았어요. 그 일이 제 인생을 바꾼 일이 됐습니다. 그때부터 ‘글을 써야 한다’는 집착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이후로 그는 학창 시절 내내 글로 이름을 날렸다. 부산중학교 때는 학교 교지에 시뿐만이 아니라 ‘영화광’이라는 가명으로 시나리오도 발표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영화였다. 하숙집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죽치고 앉아 ‘콰이강의 다리’ 등 명작부터 19금 영화까지 섭렵했다.
   
   부산고 시절에는 2학년 때 문예반장을 지내고 최초의 고교동인지로 기록된 ‘청조문예’를 창간했다. 3학년인 1971년에는 진해군항제 백일장에서 ‘항해’라는 시로 학생부가 아닌 일반부에 도전해 장원을 차지했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대학 가기까지 3년이 걸렸다. 원하는 전기 대학에 계속 떨어져 당시 후기대였던 경희대 법대에 들어갔다. 종로학원을 중심으로 입시생이라기보다 ‘낭인’으로 살았다. 한때는 당구에 빠졌다. 프로선수였던 주인이 수제자로 삼고 싶어할 정도였다. 이때 함께 몰려다닌 ‘재수 3인방’이 있는데, 정우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홍석우 전 산자부 장관이다. 그가 “요즘 제가 우택이를 열심히 씹고 있긴 하지만 그때 우정이 평생을 가더라”고 말했다. 사실 이 시기는 오늘의 전원책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100권짜리 한국사상대전집과 세계사상대전집을 사놓으셨어요. 엄청난 분량이었습니다. 니체, 쇼펜하우어, 플라톤 등 근대철학까지 관통하고 동양사상이 집대성돼 있었습니다. 밑줄 그어가며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도 서재에 꽂혀 있는데 제 책 ‘잡초와 우상’을 쓸 때도 참조를 많이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교 생활은 뒷전이고 문학이 먼저였다. 입학식과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때 대학에 소홀했던 부채감으로 10년 동안 경희대에 출강을 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대학 시절인 1977년. 연작시 ‘동해단장’으로 100만원 고료 제2회 한국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한동안 시를 놓았던 그는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나무를 꿈꾸며’로 재등단한다. 그가 군대에 있던 시절이다. 그는 사법고시가 아닌 1981년 제4회 군법무관 임용시험을 통해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제30기계화보병사단 법무참모로 군복무를 시작해 1991년 제6군단 법무참모를 마지막으로 전역하기까지 10년6개월 복무했다. 2006년 폐지된 군법무관 임용시험은 10년 이상 군복무를 해야 변호사 자격이 유지됐다.
   
   당시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박두진·조병화 시인이었다.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심사평과 당선소감이 실린 조선일보 지면이 누렇게 빛이 바랜 채 액자 속에 보관돼 있었다. 심사평에는 ‘청순하고 섬세한 정서와 표현력이 공감을 얻어 앞으로 기대가 된다’고 적혀 있다. 당선소감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법률가가 된 것을 극심하게 후회하였으며 내 문화적 허영심은 다시 시를 쓰도록 부추겼다. 그러니까 글을 포기한 지 10년 만이었다…. 투고한 후 당선고료에 해당하는 술을 미리 마시고 투고한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인간을 심판하는 일보다 시를 쓰는 것은 확실히 멋이 있는 일이요,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詩)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최근에 쓴 기가 막힌 작품이 있다고 했다. 새벽 퇴근길에 가끔 마주치는 폐지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가 모델이라고 말했다. “내가 한 번은 할머니 대신 리어카를 끌고 폐지 버리는 곳까지 간 적이 있어요. 3200원 벌이인데 진짜 힘듭디다.” 그가 시가 실린 문예잡지를 들고 와 낭독했다. 제목이 ‘습관에 대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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