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국회의원 프로필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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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치

김무성 국회의원 프로필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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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金武星, 1951년 9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51년 9월 20일에 부산에서 친일파 아버지 김용주와 어머니 강신팔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로아래 그랬다는설이 있으나 확인된바없다 라고 나옴.

부친인 김용주는 1924년 포항청년회 지육부장을 맡아 독서회 등 노동야학을 개설해 일본 경찰에 검거된 사실(동아일보 1925,5,9)과 1926년 10월 포항에서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자며 지은 '삼일상회' 설립 (매일경제 1984.2.26) 했던 애국적인 경력들도 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질 무렵 만들어져 일본에게 군수품을 헌납하는 운동과 전시(戰時) 사상통일운동을 벌였던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소속되어 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일본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자고 주장하는 등 여러가지 친일 행위를 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히 확인 된 바는 없다. 김용주(가네다 류수)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하여 그가 친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초기(대략 1941년 이전) 애국·항일 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YS를 도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하여 상도동계가 되었으며, 민주화추진협의회에도 참여하였다. 1986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8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직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통일민주당 제13대 대선 대책본부 재정국장이 되었는데, 후보단일화 실패로 인해 당시 통일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은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하였다. 같은 해에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당 기획조정실 차장을 역임하였고, 1989년에는 국회 행정실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김영삼, 김덕룡 등과 함께 민주자유당 당원이 되었다. 이후 민주자유당의 의사국장과 의원국장 등을 지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대선 후보 추대대책위원회의 총괄국장을 맡았다. 1993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94년에는 대한민국의 제47대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96년에 신한국당 소속으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남구 을에서 당선되었다. 2005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및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선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 이명박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2007년 11월에는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이후 제18대 총선에서 친박으로 분류되어 공천에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해 7월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2010년 5월부터 2011년 5월까지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냈고, 그 해 6월 대한민국 국회의 운영위원회 위원장, 국회의원 야구단 이구동성 단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한나라당의 당명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바뀌어,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정보위원회 위원을 맡으면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한중 의원외교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2년에 치러진 제19대 총선에는 또다시 공천에 탈락하여 출마하지 못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치러진 제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이 되어 새누리당의 대선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듬해 4·24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부산 영도구에서 당선되며 국회로 복귀하였다. 2014년 7월 14일에 제3차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20대 총선를 앞두고서는 '옥새런'이라 불리는 공천 파동이 일어났다. 친박계와 비박계 간에 공천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친박 성향의 이한구를 중심으로 한 공천관리위원회는 서울 은평을, 서울 송파을, 대구 동갑, 대구 동을, 대구 달성에 친박 후보들을 단수 추천하였다. 그러나 비박으로 전향한 김무성 대표는 "당헌ㆍ당규를 위반한 공천장에는 도장(대표직인)을 찍어주지 않겠다"며 이 5곳의 도장 날인을 거부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서울 은평을, 서울 송파을, 대구 동을 3곳은 무공천 지역구가 되어 비박 후보들이 출마하게 되었고, 나머지 2곳은 친박 후보들이 출마하였다. 2016년 4월 14일, 4.13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한 결과를 두고 20대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이 초래한 것이라고 하며 새누리당 선거 참패에 모든 책임을 지고 당대표에서 사퇴하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게 되자, 2016년 11월 박근혜에 대한 탄핵 추진을 시사했다.

이후 바른정당에 합류하였으나,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의 사퇴 이후 바른정당의 진로를 놓고 유승민 의원과의 갈등이 있었다. 유승민 의원은 자강론을 주장해온 반면, 김 의원은 자유한국당과의 보수통합론을 주장해왔다. 의원 만찬에서 유승민 의원과 키스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나, 김 의원은 유승민 비대위 체제에 반대했다. 결국 2017년 11월 김 의원은 "사회 각계각층, 보수우파 국민들, 보수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 보수대통합을 이뤄서 좌파정권의 폭주에 대항하도록 하겠다"며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였다.

2018년 8월에는 "공화주의 정신에 입각해, 이데올로기가 아닌 보수라는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파 정치를 만들어가야 한다."며 자신의 정치 철학을 설파했다. 그러면서 "공화주의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 독주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공화주의는 유승민 의원도 내세우는 정치철학인이나, 두 사람이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르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도서에는 공화주의를 "군주 독재에 반하는 인민 주권에 의한 공동의 정치 형태"와 "사적 이익보다 평등을 목표로 한 공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도덕 철학" 2가지로 정의했는데, 김 의원은 전자에, 유 의원은 후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51년 9월 20일 경상남도 부산시 용당동 출생

학력
1964 부산화랑국민학교 졸업
1967 경남중학교 졸업
1970 중동고등학교 졸업
1976 한양대학교 경영학 학사

경력
1976 ~ 1982 동해제강 상무
1976 ~ 1982 동해제강 전무
1982 삼동산업 대표이사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1985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1989 기획조정실 차장
1993 제14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
1993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
1994 제47대 내무부 차관
1996.05 ~ 2000.05 제15대 국회의원 (부산 남구 을, 신한국당 → 한나라당)
2000.05 ~ 2004.05 제16대 국회의원 (부산 남구, 한나라당)
2004.05 ~ 2008.05 제17대 국회의원 (부산 남구 을, 한나라당 → 무소속)
2005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2005 한나라당 사무총장
2007.11 ~ 2008 한나라당 최고위원
2008.05 ~ 2012.05 제18대 국회의원 (부산 남구 을, 무소속 → 한나라당 → 새누리당)
2010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2010.05 ~ 2011.05 한나라당 원내대표
2013.04 ~ 2016.05 제19대 국회의원 (부산 영도구, 새누리당)
2014.07 ~ 2016.04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2016.03 제20대 국회의원선거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2016.05 ~ 제20대 국회의원 (부산 중구·영도구, 새누리당 → 바른정당 → 자유한국당)
2018.05 ~ 2018.06 자유한국당 6·13 지방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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