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베클리 테페 인류최초 유적지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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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괴베클리 테페 인류최초 유적지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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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는 BC 9000~1만 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어로 '배모양의 언덕'(belly hill)을 뜻하는 괴베클리테페는 시리아와의 경계 근처에 있는데, T자 모양의 석회암 거석들이 원형으로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거석들 중 일부는 높이가 5m가 넘고 무게가 50t 이상 나간다. 이러한 형태가 서로 겹쳐져 있는 것도 있다. 완성된 각 원형은 흙으로 덮고, 바로 그 위에 같은 작업을 되풀이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거석들은 무늬가 없는 반면 어떤 거석들은 넓은 면에 여우, 전갈, 사자 등 여러 형상들을 공들여 조각했다.

스톤헨지보다 시기적으로 6,000년 가량 앞서는 괴베클리테페는 1960년대에 처음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당시에는 중세 묘지로 간주되었다. ​

1990년대에 다시 발굴이 시작되어, 그제서야 축조 시기가 제대로 밝혀졌다. 이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인 당시 도구들을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해 인근 유적들의 유물들과 비교하여 시대를 추정했다.
야생식물이나 수많은 동물 뼈, 특히 가젤의 뼈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쓰레기 구덩이나 난로, 기타 다른 주거생활의 흔적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거주지역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곳을 제식용 장소로 파악하고 있으며, 멀리서부터 참배자들이 찾아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유적의 유물들을 통해 괴베클리테페를 수렵 채집인들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많은 양의 야생동물들의 뼈가 남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 가축을 기르거나 농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유적으로 어떤 전문가들은 정착생활과 사회문화 발달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기도 했다. 정착생활이 사원 건설과 복잡한 사회 구조의 전제조건이라는 가설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괴베클리테페 건설을 위해 많은 일군들이 한곳에서 기거하며 먹고 자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협동해야 하는 일이 정착생활에 뒤이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일 때문에 정착생활이 필요했으리라는 뜻이다.괴베클리 테페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50년대 한 남자가 땅속에 묻혀 있던 돌기둥 같은 것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1963년 미국 시카고 대학과 터키 이스탄불 대학이 공동조사를 실시, 존재는 알려졌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연히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된 독일의 고고학자가 본격적 발굴을 시작하면서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연대 측정 결과 괴베클리 테페의 건축 시기가 기원전 9500년으로 추정됐다. 인류 최초의 도시인 예리코 보다 빨리 건축됐다. 괴베클리 테페는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괴베클리 테페가 건축된 기원전 9500년은 신석시 시대로, 돌괭이와 돌보습 등 간단한 기구만 사용 가능했던 시대였다. 어떻게 동물의 모양을 정교하게 돌기둥에 새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괴베클리 테페는 지구 리셋설의 증거라는 일부 주장이 나왔다. 지구 리셋설이란 고대에 고도 문명이 존재, 의도적으로 문명을 몰살한 뒤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킨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피라미드 , 마추픽추, 스톤헨지 등 불가사의한 건축물들을 근거로 들었다.

다른 일각에서는 괴베클리 테페가 외계인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건축 기술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크기도 크고 동물조각도 정교한 초기 돌기둥에 비해 후기 돌기둥이 정교함이 떨어졌다.

괴베클리 테페를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됐다. 조사 결과 괴베클리 테페와 가장 가까운 수원지는 5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돌기둥의 T자 형태가 하늘과 인간의 연결을 뜻한다는 사실과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 모두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괴베클리 테페가 종교적 신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괴베클리 테페가 종교 시설이라면 종교 발생 후 인류의 정착이 이러졌고, 이후 농경이 전파 됐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문명 발달 이론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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